소머러와 미그노뉴의 디지털 아트 작품, 「인터넷 타기」


기차 안에서처럼  두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그 옆에는 스크린이 창문처럼 설치되어 있다. 관객들이 이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면 대화 속의 단어들에 상응하는 이미지들이 화면 가득히 나타나 입체적으로 영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소머러와 미그노뉴의 디지털 아트 작품인 「인터넷 타기」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같은 최근의 예술적 시도들은 ㉠작품과 수용자 사이의 경계를 넘어 작품의 생성과 전개에 수용자를 참여시킴으로써 ㉡작품과 수용자 사이의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분명 종래의 예술관에 대한 도전이다. 종래의 예술관은 수용자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술 감상을 미적 관조로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은 ㉢예술 이외의 모든 관심과 욕구로부터 ⓐ초연한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관조적 태도와 함께 예술 작품 자체도 모든 것에서 벗어난 순수한 객체가 됨으로써 이제 예술은 그 어떤 ⓑ권위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율적 영역이 된다. 이 때문에 종종 예술은 쓸모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모든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방 공간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최근의 예술적 시도들이 예술을 상호 작용 공간으로 만들 경우 미적 해방 공간마저 일상적 삶의 긴장과 갈등, 그리고 예술 이외의 관심과 욕구로 얼룩지고 마는 것인가? 넓게 보자면 인간은 세상과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상호 작용이 외적· 내적 요인으로 인해 긴장과 갈등을 낳을 때, 인간의 경험은 대립과 분열 속에 빠지며, 이것이 지속될 때 삶은 위기를 맞는다. 반면 각각의 상호 작용의 고유성이 보호되면서도 이것이 하나의 전체 속에서 통일될 때 인간의 삶은 ⓔ극치를 이룬다. 존 듀이는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체험을 ㉤미적 체험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러한 미적 체험은 현실적 삶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오히려 이것은 예술 작품 속에서 상이한 요소, 행동, 사건, 주체들이 고유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통일성을 이룰 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듀이는 예술의 신성화가 아니라, 예술의 세속화를 원한다. 대립되고 분열된 일상의 수많은 상호 관계와 경험들은 이 세상 속에서 미적 체험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상호 작용을 강조하는 예술적 시도가 이러한 미적 체험을 실험하고 연습하는 장으로 만든다면, 이는 예술 작품을 넘어 삶 속에서도 미적 체험을 성취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