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 만화] 주자학과 양명학' 중에서(출처, 오르비)


주자학과 양명학은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인 ‘이(理)’를 탐구한다. 하지만 주자학의 ‘이’는 ‘만물의 본성이 곧 이치’라는 ‘성즉리(性卽理)’이며, 양명학의 ‘이’는 ‘내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心卽理)’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주자학의 ‘이’는 인간 주체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이치’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근원적인 원리로서의 ‘이’는 하나이지만 각각의 사물에는 저마다의 ‘이’가 개별적으로 담겨 있다. 즉 만물에 있는 개별적인 ‘이’는 모두 다르지만, 근원적인 ‘이’는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늘의 이치’인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물에 들어 있는 ‘이’를 탐구한 다음,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주자학적 전통은 개별적인 ‘이’ 보다 하늘의 이치인 ‘이’에 대한 예의법도를 중시한다.


지방마다 절도사를 두어 행정과 군 통치권을 맡겼던 당나라는 왕실의 힘이 약화되면서 절도사들의 반란이 잦아졌고 그 결과 멸망했다. 이에 송나라에서는 군주에게 의리(義理)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송나라 지식인들은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이’를 ‘현실에서의 의리’로 보았고, 주자학적 전통을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통치 원리로 삼았다.


양명학을 창시한 ‘왕수인’은 ‘이’가 주체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마음의 본체는 ‘양지(良知)’이며, 양지는 곧 하늘의 이치라고 하였다. 그의 철학은 인간 주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에 사람은 하늘의 이치인 양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양지는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타고난 도덕적 자각 능력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에서 벗어나서 양지를 회복하는 과정을 강조했다. 자신의 양지를 보존하려는 마음, 자신에게 충실하고 진실하여 그 스스로 만족하기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마음과 이치가 합일된 경지이자 인간 자신이 타고난 도덕적 자각이 완성된 상태인 ‘치양지(致良知)’에 이르게 된다. 


명나라 중기 이후 지배 세력이 농민의 세금 부담을 늘리자 농민 봉기가 확산되었다. 당시 농민의 구호는 ‘혼돈의 하늘을 열자’였다. 이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정해진 하늘의 이치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주자학 대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라는 시대적 요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수인은 하늘이 정한 이치가 인간 주체와 분리되는 철학으로는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양명학은 개인과 자아라는 근대적 의식이 싹트고 전통 도덕으로 개인 의지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주자학과 양명학은 새로운 질서의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궁극적인 앎인 ‘이’에 관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 김교빈 외, 「함께 읽는 동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