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회화처럼 화가가 붓을 들고 종이를 메워 나가거나, 조각처럼 정과 망치를 들고 돌을 깎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카메라를 포함한 기계적 장치와 사진가의 선택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찰나의 순간에 기록된 이미지에는 사진을 사진답게 만드는 사진만의 특성이 담겨 있다. 사진은 어느 화가의 작품보다도 높은 해상력을 가지며, 어떤 장르의 예술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사실적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이 과연 예술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제작 과정에서 기계의 역할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과 작가가 결과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듯, 카메라는 렌즈 앞에 존재하는 것만을 프레임 안에 담기 때문에 사진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진 이미지는 세상의 이미지들 중에서 사진가의 눈을 통하여 선택된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사진에서는 사진가의 눈이 중요하다. 카메라는 앞에 있는 대상의 의미에 대하여 침묵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가가 대상을 알지 못하면 볼 수도 찍을 수도 없다. 대상을 선정하여 기록하고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사진가는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해야 한다. 이것이 사진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눈 ㉠‘관찰의 눈’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진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사진가의 눈에 비친 그 존재는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위에서 변화하고 있다. 사진가는 변화하는 대상의 존재감 혹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사진을 통하여 부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진가가 갖출 두 번째 눈 ㉡‘존재의 눈’이다.


사진가가 갖추어야 할 세 번째 눈은 ㉢‘시간의 눈’이다. 사진에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사진은 카메라의 작동에 따라 물리적인 특성을 지니고 순간적으로 기록된다. 이 순간성이 이 사진의 첫 번째 시간인 물리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기록되는 순간, 대상은 흐르는 시간에서 튀어나와 현재가 되고 영원성을 지닌다. 사진가가 선택한 결정적 순간이 곧 정신적 순간이고, 이 순간을 선택하는 능력이 바로 ‘시간의 눈’이다.


사진가가 갖추어야 할 네 번째 눈은 ㉣‘소통의 눈’이다. 사진은 시각언어이다. 사진은 현실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낸다. 사물을 찍은 사진은 대상의 구체적인 상태나 상황을 재현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곧바로 인지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세상과의 소통이다. 좋은 눈을 가진 사진가는 사진을 매개로 한 소통을 쉽게 이끌어 내며 사진의 사실감을 넘어서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 진동선, ‘좋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