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dican.kr


사진술은 다양한 물질의 감광성에 대한 길고도 지루한 실험의 토대 위에서 출현하였다. 상(像)을 정착시키는 기술의 선구자인 니에프스와의 공동 연구 이후 다게르는 1837년에 동판 위에 감광성 물질인 요오드화은을 점착시키고 암상자 속에서 빛에 노출시킨 다음, 수은 증기를 쐬어 세부 묘사가 대단히 정밀한 상을 얻어 내었다. 한편 영국인 톨벗은 1835년에 최초의 ‘감광 소묘’에 성공했는데 이것은 염화은으로 감광성을 띠게 한 종이 위에 물건이나 식물을 놓고 산출한 음화(陰畵)였다. 그 직후 그는 작은 암상자를 이용하여 사물의 영상을 종이에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거친 종이 면에 정착된 톨벗의 영상은 매끈한 다게르 동판의 선명도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1839년에 두 기술의 운명을 갈라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게르는 ‘다게레오타입’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기술을 프랑스 정부에 인도하는 대가로 거액의 종신 연금을 약속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다게레오타입의 제작 비결을 공개했고 이로써 저작권이 없어진 이 기법은, 다게르가 특허를 낸 영국을 제외하고 세계 어디서나 아무 제한 없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게레오타입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한편 톨벗의 기법은 휴대의 간편성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톨벗은 계속된 연구를 통해 1840년에 암상자에서 얻은 음화를 현상하여 여러 장의 양화(陽畵)를 인화하는 음화-양화 기법 개발에 성공하였다. 다게레오타입은 한 번의 촬영으로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얻을 수 있었으나 톨벗의 새 기술은 여러 장의 똑같은 종이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사진을 다량으로 복제하는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톨벗은 자신의 새로운 기법을 ‘칼로타입’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톨벗이 칼로타입과 관련된 특허를 출원하고 그 기술에 대해 많은 사용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이 기술의 확산에는 제동이 걸렸다.


사진이 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 준 분야는 초상 사진이었다. 정밀한 세부 묘사를 장점으로 하는 다게레오타입은 초상 사진 분야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여러 곳에 사진관이 들어서서 영구적인 초상을 금속판에 남기는 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반면에 명암의 차이가 심하고 중간색이 거의 없었던 칼로타입은 초상 사진보다는 풍경․정물 사진에 제한적으로 이용되었다. 특허에 묶여 있었던 칼로타입이 그나마 퍼질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화가와 판화가들은 칼로타입이 흑백의 대조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판화와 유사함을 발견하고 이 기법을 활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지속적인 압력과 설득으로 톨벗은 1852년에 초상 사진 영역을 제외하고 칼로타입의 특허권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영국에서 이 기법을 유행시키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 1850년대 초에 콜로디온을 유리에 발라 선명한 음화를 얻고 그것에서 원하는 대로 양화를 얻을 수 있는 콜로디온 기법이 특허권 없이 공개되면서 다게레오타입과 칼로타입은 모두 퇴조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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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http://blog.daum.net/yunsung007/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