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借用)은 창작을 중시하는 예술 세계에서, 과거에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개인의 독창성이 담긴 원작만이 진품이고, 이를 차용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현대 미술에서는 다양한 양태의 차용이 성행한다. 피카소의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뒤샹의 「L.H.O.O.Q」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차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적으로 ‘허용이 되는 차용’과 ‘허용이 되지 않는 차용’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위조와 표절은 ‘허용이 되지 않는 차용’, 패러디와 패스티시는 ‘허용이 되는 차용’으로 구분된다.
위조는 작품 제작의 내력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속이려는 의도가 필수적이다. 표절은 타인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으로 제시하는 행위로, 독창성이 중시되는 창작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행위이다. 위조와 표절 모두, 속이려는 의도에 있어서는 공통되는데, 위조는 원작자의 권위에 기생하여 자신을 은폐하는 것이고, 표절은 표절자 스스로 권위를 부여받기 위해 원작을 은폐하는 것이다.
패러디는 일반적으로 풍자를 목적으로 한다. 원작을 모방하지만 원작으로부터 원작 이상의 의미를 도출시키는 유머와 비평이 있는 예술적 작업이다. 따라서 패러디는 작품의 고유성보다는 원작을 인용하여 그것을 비판하거나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린다 허천은 텍스트에 대한 ‘구조적 덧붙이기’에 의해 원작에 대한 비평적 거리가 발생할 때 패러디가 성립한다고 하였다. 패러디가 요구하는 비평적 거리는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원작이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독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패스티시는 패러디와 달리 비판이나 풍자의 의도 없이 기존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발달로 원작의 진품성, 희소성 관념이 해체되면서 원작의 형식적 구성 요소나 기법을 그대로 전용하는 패스티시가 등장한다. 이같은 차용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만 있을 뿐 비판성이 전혀 없다. 패스티시는 말하자면 “오리지널한 텍스트는 없다.”, “스타일상의 개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표절에 함축된 부정적 의미를 오히려 해체시킨다.”라는 것이다. 이 경우 패스티시는 원작의 가치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독창적일 수 있다.
앞으로 미술에서 차용은 더욱 성행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철학적·미학적·비평적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이는 필경 문화와 예술과 삶의 맥락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구하는 시험대로 우리를 수시로 호출할 것이다.
― 윤자정 외, <현대의 예술과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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