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신분 질서 등과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 ‘자유’ 등의 관념을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얻게 된 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무엇에로의 자유’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영위하면서 나름대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던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용한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적대적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유는 얻었지만 그로 인한 불안감과 고독감은 더욱 증대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들은 이러한 불안과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중 하나가 복종을 전제로 하는 권위주의적인 양태이다. 이는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 종속되고자 하는 것으로, 사라진 ㉡제1차적인 속박 대신에 새로운 ㉢제2차적 속박을 추구하는 양상을 띤다. 이것은 때로 상대방을 자신에게 복종시킴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만족을 얻으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견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 두 형태는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권위주의적 양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도피의 또 다른 심리 과정은 외부 세계에 의해서 그에게 부여된 인격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스스로 중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된다. 나와 외부 세계 간의 모순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고독과 무력감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 자아를 포기해버린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하게 된 인간은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자아의 상실이라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는 부단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불안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속성상 인간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속박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가? 개인이 하나의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하면서도 외부 세계와 ⓑ합치되는 적극적인 자유의 상태는 없는가?


‘자발성’은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된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외부 세계에 새롭게 ⓒ결부시키기 때문에, 자아의 완전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극적인 자유는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며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자아를 약화시켜 끊임없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자발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 자유에는 다음과 같은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개인적 자아보다 더 높은 힘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그의 생활의 중심이자 목적이라는 원리와 인간의 개성의 성장과 실현은 그 어떤 목표보다 우선한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측면에 더하여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질 때 근대 이후 인간을 괴롭히던 고독감과 무력감은 극복될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