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조선시대 (12)

독서/인문

유서(類書)(2022, 수능)

(가) 중국에서 비롯된 유서(類書)는 고금의 서적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항목별로 분류, 정리하여 이용에 편리하도록 편찬한 서적이다. 일반적으로 유서는 기존 서적에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배열할 뿐 상호 비교하거나 편찬자의 해석을 가하지 않았다. 유서는 모든 주제를 망라한 일반 유서와 특정 주제를 다룬 전문 유서로 나눌 수 있으며, 편찬 방식은 책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왕조 초기에 많은 학자를 동원하여 국가 주도로 대규모 유서를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의 지식을 집성하고 왕조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었다. 고려 때 중국 유서를 수용한 이후, 조선에서는 중국 유서를 활용하는 한편, 중국 유서의 편찬 방식에 ⓐ 따라 필요에 맞게 유서를 편찬하였다. 조선의 유서는 대체로 국가..

독서/인문

조선 초기의 역사서 편찬(2022, 6월모평)

조선 초기에 진행된 고려 관련 역사서 편찬은 고려 멸망의 필연성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편찬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려와 조선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고려보다 조선이 뛰어남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태조의 명으로 고려 말에 찬술되었던 자료들을 모아 고려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되었지만, 왕실이 아닌 편찬자의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태종은 고려의 역사서를 다시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고려의 용어들을 그대로 싣자는 주장과 유교적 사대주의에 따른 명분에 맞추어 고쳐 쓰자는 주장이 맞서는 등 세종 대까지도 논란이 ⓔ 계속되었지만, 문종 대에 이르러 『고려사』 편찬이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 연구에 관심을 기울인 세종은 경서(經書)가 학문의..

독서/인문

최명길의 주화론(2022, 고3, 4월)

병자호란 당시 청이 조선에 제시한 강화 조건은 조선이 ⓒ 고수해 왔던 명에 대한 의리, 곧 대명의리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에 ㉠ 척화론자들은 대명의리를 지켜야 하므로 청과의 화친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당대인들은 조선과 명을 군신(君臣)이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는 관계로 보았고, 특히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을 받은 후 대명의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으로 인식되었다. 척화론자들은 불의로 보존된 나라는 없느니만 못하다고까지 하면서 척화론을 고수하였다. 이때 이들이 우려한 것은 명의 ⓓ 문책이라기보다는 대명의리라는 보편적 규범의 포기에 따르는 도덕 윤리의 붕괴였다고 할 수 있다. 척화론은 실리의 문제를 초월한 의리의 차원에서 당시뿐 아니라 후대에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독서/사회

조선 시대 형법은 죄형 법정주의인가?(2021, 고3, 10월)

죄형 법정주의란 어떠한 행위가 범죄이고 그 범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미리 성문의 법률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조선의 형법은 처벌의 기준을 명시한 성문화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시대 형법에서 죄형 법정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입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형법에서 죄형 법정주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입장이 있다. 조선 시대 형법은 범죄의 종류, 범죄자나 피해자의 신분 등을 개별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형량이 결정되는 정형주의적 형식을 따랐다. 조선 시대 형법의 일반법으로 적용되었던 대명률의 ‘단죄인율령조’에 따르면 죄명을 확정할 때는 반드시 율령* 을 따르고, 이를 ⓓ경우 벌을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법관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함과 동시..

독서/인문

과거제의 부작용과 개혁론(2020, 6월모평)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관료 선발 제도 개혁론인 유형원의 공거제 구상은 능력주의적, 결과주의적 인재 선발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와 함께 신분적 세습의 문제점도 의식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17세기 무렵 관료 선발에서 세습과 같은 봉건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재도입하려는 개혁론이 등장했다. 고염무는 관료제의 상층에는 능력주의적 제도를 유지하되, ㉮ 지방관인 지현들은 어느 정도의 검증 기간을 거친 이후 그 지위를 평생 유지시켜 주고 세습의 길까지 열어 놓는 방안을 제안했다. 황종희는 지방의 관료가 자체적으로 관리를 초빙해서 시험한 후에 추천하는 ‘벽소’와 같은 옛 제도를 ⓑ 되살리는 방법으로 과거제를 보완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론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제를 시행했던 국가들에서는 수백 년..

독서/인문

책문(策文)(2012, 고3, 10월)

조선 시대 과거는 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과거는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에서는 왕이 직접 등용될 인재들에게 당대의 현안들을 책제(策題)로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 시험을 치렀다. 책제로 제시된 현안은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이 시험에서 예비 관리들은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글로 썼는데, 이 글을 ⓑ책문(策文)이라 한다. 책문은 왕이 제시한 책제에 답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짓는다. 책문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는 말로 시작하여 “식견이 부족한 저희를 불러, 조금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될 말을 들을까 하며 시험을 내..

독서/인문

선비와 선비 정신(2010, 고3, 7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립한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선비는 사회의 지도 계층으로서 그 지위가 확립되었다. ‘선비’라는 말은 ‘사대부(士大夫)’의 신분에 속하면 아무에게나 붙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물에게 존경의 뜻을 실어서 부르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는 벼슬길에 나가든 산림에 은거하든 상관없이 항상 자신을 선비로서 다듬어야 하는 임무를 지닌다. 선비는 조정에서 임금의 정치를 보좌할 때 선비다운 기개를 발휘하여, 권세와 지위를 이용한 부당하고 불법적인 태도에 맞서, 그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야 한다. 혹 벼슬하려는 뜻을 버리고 산림(山林) 속에 은거하여 ‘처사(處士)’..

독서/인문

지행론(知行論)(2009, 수능)

조선 성리학자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지(知)와 행(行)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특히 도덕적 실천과 결부하여 지와 행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기본적인 입장은 ‘지행병진(知行竝進)’이었다. 그들은 지와 행이 서로 선후(先後)가 되어 돕고 의지하면서 번갈아 앞으로 나아가는 ‘상자 호진(相資互進)’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만물의 이치가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고 도덕적 수양을 통해 그 이치를 찾고자 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일부 실학자들은 지행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였다. 홍대용은 지와 행의 병진을 전제하면서도, 도덕적 수양 외에 사회적 실천의 측면에서 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용 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민생..

독서/인문

조선의 조총 도입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2009, 6월모평)

조선 전기 조선군의 전술에서는 기병을 동원한 활쏘기와 돌격,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보병의 다양한 화약 병기 및 활의 사격 지원을 중시했다. 이는 여진족이나 왜구와의 전투에 효과적이었는데, 상대가 아직 화약 병기를 갖추지 못한 데다 전투 규모도 작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적 우위는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의해 상쇄되었다. 16세기 중반 일본에 도입된 조총은 다루는 데 특별한 무예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분이 낮은 계층인 조총 무장 보병이 주요한 전투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절강병법은 이러한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로, 조총과 함께 다양한 근접전 병기를 갖춘 보병을 편성한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주력이 천민을 포함한 일반 농민층이었는데, 개인의 기량은 떨어지더..

독서/인문

임금이 당대 사관의 역사 기록을 열람하면 안 되는 이유(2007, 수능)

예전에 당(唐) 태종이 방현령에게 이르기를 “선대(先代)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을 임금에게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방현령이 대답하기를 “사관은 거짓으로 칭찬하지 않으며 나쁜 점을 숨기지 않으니, 임금이 이를 보면 반드시 노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에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방현령에게 명하여 순서대로 편찬하여 올리게 했습니다. 방현령은 선대의 실록을 편찬하여 올렸지만, 말에 은근히 숨긴 것이 많았습니다. 어질고 슬기로웠던 태종으로서는 마땅히 바른대로 쓰여 있더라도 싫어할 점이 없었을 것인데, 방현령 같은 일세의 현명한 재상도 오히려 사실을 숨기고 피하여 감히 바른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혹시 태종에게 ㉠미치지도 못하는 후세의 군주가 자기 시대의..

독서/인문

임진왜란 때 의병의 봉기 원인(2006, 9월모평)

한국사 연구에서 임진왜란만큼 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연구 주제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주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향적이었다. 즉, 온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사례로만 제시되면서, 그 이면의 다양한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의병의 봉기 원인은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의병이 봉기한 이유를 주로 유교 이념에서 비롯된 ‘임금에 대한 충성’의 측면에서 해석해 왔다. ⓐ실제로 의병들을 모으기 위해 의병장이 띄운 격문(檄文)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일면 타당하다. 의병장은 거의가 전직 관료나 유생 등 유교 이념을 깊이 체득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일반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

독서/인문

규장각(2005, 9월모평)

조선 왕조는 유교 정치를 표방하여 오래도록 문(文)을 숭상하였다. 규장각은 이러한 전통 아래 정조(正祖) 때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 기구였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하던 해(1776년)에 창설되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발족이 아니라, 정조가 동궁(東宮) 시절에 경희궁에 살면서 설치.운영해 온 기구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창덕궁 후원의 연지(蓮池) 북쪽 언덕에 이층 건물을 새로 짓도록 하고 이름을 주합루(宙合樓)라 하였다. 이 건물 1층의 이름을 처음에는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였다가 얼마 후 규장각(奎章閣)으로 개칭하여 자신의 왕위(王威), 즉 국왕으로서의 위엄에 관련되는 자료들을 보관하기 로 하였다. ‘규장’이란 본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