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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는 유목 민족과 정주 민족 간 투쟁의 역사이다. 유목 민족은, 농경을 주업으로 하여 문명에서 앞서간 정주 민족에게 결국 패배하였다.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용맹한 유목 민족인 훈족 역시 역사에서 흔적 없이 소멸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새로운 유목 민족이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기마병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국경을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신유목 시대를 열고 있는 종족이 바로 21세기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이다.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정보기술(IT)을 갖추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라고 예언했다.


신유목 시대는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하는 세계화와 관련이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 시대의 돈과 노동력은 철저하게 유목화한다. 유목민이 말을 타고 새로운 영토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듯 21세기의 자본은 더 높은 수익률을, 노동력은 더 나은 삶을 모색하며 쉬지 않고 움직인다. 현대의 유목은 물리적인 현실 공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이동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현대인에게 움직인다는 것의 의미는 더 이상 지구 표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신유목 시대의 두 축은 사이버 세계와 유목 행위이다. 과거 유목민이 오아시스라는 허브*를 통해 생존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듯, 디지털 노마드는 인터넷에서 생존의 조건을 확보한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다양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유비쿼터스*는 새로운 유목민의 환경이다. 유목민은 성을 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을 떠난다. 조상과 자신이 출생한 공간은 낡은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모국어를 버리고 이방에서 외국어를 쓰며 생활한다.

  

신유목 시대에는 국가주의가 퇴조하고 세계시민주의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세계화와 민족주의 사이의 갈등과 불확실성이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지구촌은 남북격차*에 디지털 격차까지 겹쳐 빈익빈부익부 구조가 더욱 심해지고 고착될 수도 있다. 남쪽 세계에 속한 인구는 디지털 노마드로 변신을 꾀하기는커녕, ㉡생존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 흙먼지 길을 전전해야 하는 가난한 유랑민으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하는 데 있다. 공동체적 유대의 기본 정신은 ‘박애와 관용’이다. 과학기술과 네트워크에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을 때, 인간을 소외시켰던 바로 그 과학기술과 네트워크는 신유목 시대의 미래를 열어가는 정신적 토대로 전환될 수 있다.


1,600여 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유목 민족인 훈족은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21세기의 새로운 유목민도 비슷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도처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의 싹을 잘 키운다면, 디지털 노마드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종족으로 남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노마드(nomad) : 유목민.

* 허브(hub) : 중심에 위치하여 바큇살 모양으로 다른 부분을 접속하는 중계 장치.

* 유비쿼터스(Ubiquitous) : 두루누리. 정보 사용자가 네트워크나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 환경.

* 남북격차 : 북반구에 있는 나라와 남반구에 있는 나라 사이의 불균형한 경제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