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dolf Carnap (1891-1970)

 

 

언어 분석철학자인 카르납은 어떤 언명이 어법에 맞지 않거나 관찰 가능한 경험적 문장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경우에 그 언명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이를 ‘사이비 언명’이라 부르며 배척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의 두 문장을 살펴보자.

 

Ⅰ. 카이사르는 그리고(Ceasar is and).
Ⅱ. 카이사르는 소수이다(Ceasar is a prime number).

‘Ⅰ’은 어법에 맞지 않아서, ‘Ⅱ’는 참과 거짓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관찰 사실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이비 언명’에 해당한다. 카르납은 특히 Ⅱ와 같은 유형의 사이비 언명에 대해 언급하는 과정에서,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이 언어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하이데거는 ‘무(無)란 무 자체가 무화(無化)한 것으로서 존재인 동시에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언명을 통해 ‘무’도 관찰 가능한 대상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카르납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언명에서 원래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문자적 의미의 ‘무’가 ‘존재인 동시에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은유적 의미로 슬그머니 바뀌었음을 지적했다. 즉 카르납은 ‘무’에 대한 하이데거의 언명이 은유의 개입으로 인해 문자적인 의미가 은유적인 의미로 아무 이유 없이 변경된 사이비 언명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던 카르납은 세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언어를 문자적 언어와 은유적 언어로 나누고 전자는 과학과 같은 객관적 사실의 영역에, 후자는 문학과 같은 정서적 표현의 영역에 각각 고정해 두고자 했다. 카르납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의 영역 안에서 세계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에게 시인들의 은유적 언어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무의미한 대상에 불과했으며, 오직 문자적 언어만이 세계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이러한 카르납의 언어관과 달리 실용주의자 로티는 언어란 역사적 우연성의 산물로, 거기에는 어떤 고정적 의미나 초월적 진리가 담겨있을 수 없다는 다원주의적 관점을 보여 준다. 언어의 의미는 대상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연하게 정해지는 것으로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로티는 객관적인 문자적 언어와 주관적인 은유적 언어는 명확히 구분될 수 없으며 구분해 줄 만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어를 구분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지시하는 하나의 특별한 언어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로티는 이러한 생각이 언어의 우연적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은유적 언어는 그것이 사용된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일 뿐 언어 자체가 은유적인 본질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로티는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어적 서술들의 옳고 그름만 서로 비교할 수 있을 뿐, 끝내 세계의 옳고 그름을 제시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로티는 ㉮ 옳다고 여겨지는 어떤 언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언명이 주어진 상황을 드러내는 데 적절하다는 것을 특정 시대의 전통과 공동체가 승인한다는 의미일 뿐 문화적, 시대적 배경을 초월하여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세계에 관해 우리가 밝히는 것이 세계와 언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서술하는 언어끼리 비교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문자적 언어가 은유적 언어보다 그 진리에 더 부합한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티는 이러한 언어관을 바탕으로 우리가 서술해 나가는 진리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재서술되면서 변화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런 점에서 철학적인 작업을 엄밀하고 체계적인 학문으로서보다는 문학적이고 시적인 작업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로티는 개인이 사적 공간에서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해 자신만의 어휘로 서술해 나가는 시인과도 같은 작업을 통해 저마다의 진리가 우연적이고 상대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보았으며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재서술해 나가는 개인을 일컬어 ㉠ 아이러니스트라고 불렀다.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의 작 업이 자기완성의 길일 뿐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그 개인적 진리를 공적 영역으로 끌고 나와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강요할 수도 없다고 단정했다. 로티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던 과거의 수많은 철학자들 역시 아이러니스트에 불과할 뿐이므로, 그들이 찾은 진리 또한 사적 영역에 한정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스트는 사적인 영역에만 갇혀 공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으므로, 로티는 사적 영역에서 아이러니스트의 작업을 수행함과 동시에 공적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자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가 말하는 ㉡ 자유주의자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제도와 관습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쳐 나감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줄여 나가는 연대성을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 한다. 이렇듯 로티는 보편적 기준이 적용될 수 없는 사적인 영역과 시대의 보편적 기준에 의해 지배되는 공적인 영역을 분리함으로써 진리 탐구의 과정과 사회적 문제 해결의 과정을 명확히 구분하고자 했다.

 

 

Richard McKay Rorty (1931-2007)

 

 

― (출전) 이유선, <듀이&로티 미국의 철학적 유산 프래그머티즘>

@ 2020학년도 7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33~3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