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서양 철학의 핵심적 질문이다. 탈레스가 세계의 본질을 ‘물’이라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서양 철학은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불변하는 측면과 그렇지 않은 측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본질은 어떤 사물의 불변하는 측면 혹은 그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 주는 특성을 의미하는데,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사물 본연의 핵심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책상의 본질적 기능이 책을 놓고 보는 것이라면, 책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비본질적 행위이고 이러한 비본질적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본질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사물의 본질이란 사실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상 자체가 원래 ‘책을 놓고 보는 것’이라는 본질을 미리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책상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면서, 즉 책상에 대해 인간이 경험적으로 행동을 해 보고 난 후에 책상의 본질을 그렇게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여 책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라는 저서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러해.’라고 나는 되풀이해서 중얼거린다. 만일 내가 나의 시선을 이 사실에다 그저 아주 명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고 말했다. 책상을 보고서 책상은 이렇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중얼거리는 것은 사후적 구성의 논리가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 것만 같은 느낌은 사후적 구성의 반복을 통해 책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그의 저서에서 ‘본질적이니 비본질적이니 하는 것들이 언제나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라고 말한다. 램프의 본질적 기능은 빛을 내는 것이지만 방을 장식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다. 빛을 내는 것이 램프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믿으며 램프의 사용 목적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할 경우, 자신이 믿고 있는 본질을 어기는 타자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파이프를 그린 화가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닮은 형상을 그리고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그림 속 형상을 파이프로 인식할 것이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자는 사람들의 인식을 배반하게 만든다. 이 그림을 본질에 대한 문제와 연결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본질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 구성에 의해 획득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질주의자들이 강조한 사물의 본질은 단지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강신주, <본질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