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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기가 1대밖에 없는 병원에 동등하게 살아남을 기회를 가진 2명의 환자가 동시에 실려 왔다. 한 사람은 출산을 앞둔 여성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다. 치료 의무가 있는 담당 의사는 인공호흡기가 1대밖에 없기 때문에 그중 한 사람은 치료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복수의 의무가 서로 충돌하여 행위자가 하나의 의무만을 이행할 수밖에 없는 긴급 상황에서, 하나의 의무를 이행하면 다른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상호 관계에 있는 경우를 의무 충돌이라 한다. 의무 충돌 상황에서 의무는 법적 의무이어야 하며, 행위자는 의무 충돌 상황을 야기한 책임이 없어야 의무 충돌이 성립한다. 의무는 특정 행위를 해야 할 작위 의무와 하지 말아야 할 부작위 의무로 구분된다. 작위란 행위자가 신체적 힘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변경을 가한 경우를 말하며, 부작위는 변경시킬 수 있지만 아무런 신체적 힘을 투입하지 않고 사건이 벌어질 것을 방치한 것을 말한다. 가령 위의 응급 상황에서 담당 의사가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연결하지 않는 부작위가 일어났다면 의사는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작위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의무가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은 부작위 의무 대 부작위 의무, 작위 의무 대 부작위 의무, 작위 의무 대 작위 의무의 충돌 형식을 띨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충돌 형식들이 모두 의무 충돌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형법학자들은 ㉠부작위 의무 간의 충돌은 의무 충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한편, 작위 의무 대 부작위 의무의 충돌은 견해에 따라 의무 충돌이 아니라 긴급 피난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긴급 피난이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이다. 이때 법익이란 법이 보호하는 이익이고, 위난이란 법익에 대한 위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운전 중 갑자기 나타난 보행자를 ⓐ피하려 했는데, 좌측은 낭떠러지였기 때문에 급히 핸들을 우측으로 ⓑ꺾어 건물 일부를 파손하는 행위는 긴급 피난으로 볼 수 있다. 긴급 피난으로 인정되면 벌하지 않는다. 이를 의무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타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작위 의무와 타인의 재산을 파괴하면 안 된다는 부작위 의무의 충돌 상황에서 핸들을 꺾는 작위에 의해 부작위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작위 의무 대 부작위 의무의 충돌은 긴급 피난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므로 의무 충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는 것이다.

의무 충돌과 긴급 피난은 모두 긴급 상황에서 한쪽의 법익을 보전하기 위해 다른 한쪽의 법익을 침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의무 충돌 자체가 긴급 피난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의무 충돌과 긴급 피난은 의무의 범위를 작위 의무로 한정하면 그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긴급 피난은 위난을 제3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위난을 감수함으로써 법익 충돌을 해결할 가능성이 있는 것에 반해, 의무 충돌은 그와 같은 가능성이 없다. 즉 앞선 사례에서 운전자는 핸들을 우측으로 꺾지 않고 좌측으로 꺾어 자신의 법익을 희생함으로써 법익 충돌을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앞서 언급한 담당 의사에게는 그와 같은 가능성이 없다. 또한 행위자가 적극적인 어떤 활동을 하는 작위에 의해 법익 침해가 이루어지는 긴급 피난과 달리, 의무 충돌은 행위자가 사건이 벌어질 것을 방치하는 부작위에 의해 법익 침해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의무 충돌은 대개의 경우 작위 의무 간의 충돌을 ©뜻한다.

의무 충돌을 작위 의무 간의 충돌로 한정한다면 두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충돌하는 의무 사이에 가치의 경중이 있는 경우와 서로 동등한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가치가 낮은 의무를 희생하고 가치가 높은 의무를 이행하는 행위는 위법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형법학의 일반적 견해이다. 왜냐하면 복수의 의무 중 가치가 높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법질서에 합치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동등한 가치의 의무가 충돌할 때에는 부작위에 의한 법익 침해에 대해 위법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와 위법성은 성립하지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위법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를 ⓔ일러 위법성 조각설이라 한다. 이에 따르면 동등한 가치의 의무가 서로 충돌하여 의무를 동시에 이행할 수 없다면 그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는 행위자의 양심에 따른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만약 위법하다면 어느 하나라도 의무를 이행한 자의 행위와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은 자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되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동등한 가치의 의무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의무 위반에 대한 위법성이 있지만 다만 그 책임이 면제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책임 조각설이라 한다. 이에 따르면 동등한 가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그 행위는 위법성이 성립하지만 의무 충돌에서는 적법 행위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면책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김준혁, ‘정당화적 의무 충돌과 면책적 의무 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