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청이 조선에 제시한 강화 조건은 조선이 ⓒ 고수해 왔던 명에 대한 의리, 곧 대명의리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에 ㉠ 척화론자들은 대명의리를 지켜야 하므로 청과의 화친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당대인들은 조선과 명을 군신(君臣)이자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는 관계로 보았고, 특히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을 받은 후 대명의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으로 인식되었다. 척화론자들은 불의로 보존된 나라는 없느니만 못하다고까지 하면서 척화론을 고수하였다. 이때 이들이 우려한 것은 명의 ⓓ 문책이라기보다는 대명의리라는 보편적 규범의 포기에 따르는 도덕 윤리의 붕괴였다고 할 수 있다. 척화론은 실리의 문제를 초월한 의리의 차원에서 당시뿐 아니라 후대에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