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으로 번역되는 똘레랑스라는 말은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나왔다. 서구 사회에서 인종, 문화, 종교의 차이는 격렬한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똘레랑스다. 1572년 기독교 구교(가톨릭)와 신교(위그노)의 갈등으로 인해 파리에서만 3,000여 명의 신교도가 구교도에 의해 희생되었고, 이후에도 그 갈등과 피해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모아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것을, 즉 똘레랑스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종교간의 갈등이 진정되면서 똘레랑스를 외치는 목소리는 종교를 넘어 점차 사회 전반으로 퍼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똘레랑스는 몇 가지 원리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원리들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 근본 정신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이다. 우선 똘레랑스는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편협함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필리프 사시에는 ‘똘레랑스는 자기중심주의의 포기’라고 얘기한다. 자기라는 중심을 버릴 때 또 다른 자아인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가 모든 차이와 다양성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사시에는 똘레랑스가 정착하려면 ㉠차  이의 질서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의 평화적인 공존을 전제하  는 유사성의 질서도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르다는 것은 소중하지만 단순히 ‘차이’만을 존중할 경우 똘레랑스는 모든 폭력적인 행위마저 차이의 표현으로 인정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똘레랑스 속에도 앵똘레랑스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등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  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도덕적인 의무인 앵똘레랑스’와 ‘억압적인 앵똘레랑스’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이다. 


똘레랑스의 또다른 원리는 토론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비판적인 천재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성과 경험만으로 오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인간의 경험이란 한계가 있고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므로 경험과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과의 이성적인 토론은 내 견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고 상대방의 의견도 보완해 준다. 말과 설득이 아닌 다른 수단, 즉 폭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믿음이 진리일 수 없음을, 남을 설득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관용인 똘레랑스는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를 닮았다. 한 손엔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저울을, 다른 손엔 불의를 응징하는 칼을 들고, 편견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가린 여신의 모습은 똘레랑스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똘레랑스는 토론과 설득보다는 힘의 논리가 앞서는 사회, 차이와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 이성과 배치되는 억압적인 앵똘레랑스가 주도하는 사회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사회윤리이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