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개체적 사건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역사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파악된 과거의 사실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가의 역사 연구 태도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두 가지의 개념 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랑케는 역사적 사실을 ‘신(神)의 손가락’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계의 사물과 동일시했다. 그는 각 시대나 과거의 개체적 사실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고유의 가치를 지녔으며, 이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역사가가 그것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신성한 역사를 오염시키는 것이라 여기고,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역사가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역사가는 사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확인을 통해 역사를 인식해야 하며, 목적을 앞세워 역사를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드로이젠은 역사적 사실이란 어디까지나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에 의해 학문적으로 구성된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단순히 과거 사건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았으며,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 사건들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하나의 지식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사료 고증만으로는 과거에 대한 부분적이고 불확실한 설명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드로이젠이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을 강조했다고 하더라도, 역사가가 임의로 과거의 사실을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역사가가 과거의 개체적 사실들 가운데 일부를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하기 이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범주*로서의 역사’가 있다고 보았다. 즉 범주로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역사가의 역사인식을 선험적으로 규정한다고 본 것이다. 이때, 역사인식의 범주를 형성하는 것은 ‘인륜적 세계’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주어진 자연의 세계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인륜적 세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이와 같은 인륜적 세계 속에서 일어나며 또한 그것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드로이젠은 랑케의 객관적 역사인식과 달리 역사인식의 주관성을 주장하면서도,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륜적 세계가 역사가의 역사인식과 해석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주관주의적 역사인식론은 결코 상대주의로 나아가지 않았다.


* 범주: 사물의 개념을 분류할 때 그 이상 일반화할 수 없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최고의 유개념(類槪念).


― 김기봉,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